서종면 문호리를 제가 처음 방문한 때는 1994년 이였습니다. 최근에 문을 연 황순원 소나기 마을이 있는 곳이 서종면 수능리 입니다. 이 수능리에 당시 한 신문에 '시인의 마을' 이라는 전원마을을 분양한다는 광고가 게제되었습니다. 이 광고를 보고 물어 물어 찾아 갔더니 그 곳은 아직 개발 초기라 아무 것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곳을 방문하고 점심식사를 한 곳이 바로 문호리에 있는 서종가든 이였습니다.
그날 문호리를 방문한 첫 인상은 참 아름다운 마을이구나 감탄이였습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시간만 나면 문호리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문호리는 1974년 팔당댐이 생기기 전까지 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 나루를 통해 강원도 쪽에서 나온 장작과 숯을 서울로 실어날랐습니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당시 나루는 시장의 기능을 겸하고 있어서 문호나루를 중심으로 제법 큰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골치고는 아주 풍부한 인프라인 초등학교, 중학교, 우체국, 면사무소, 수퍼 마켓, 교회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팔당댐 이후에 서종면은 급속히 인구가 감소해 아주 조용한 시골마을이 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 했습니다. 이후 지난 10여년전부터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로 서서히 인구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해, 지금은 문호나루 시대의 인구에 이르렀고, 점차 도시화가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처음 터를 잡았던 1995년에 비하면 많이 변했습니다.
아래 경인일보의 자료를 살펴 보시면, 이 지역의 변화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나루가 시장 기능까지 겸하였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듯 가평 관내에 장시는 읍내장과 현리장 두 군데 밖에 없었다. 다른 고을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현리(縣里)는 일찍이 폐현(廢縣)된 조종현의 읍치다. 가평이 큰 고을이 아님은 면 구성이 방위면(方位面) 체제인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 중 동면(東面)이 없는 것은 고을 중심인 가평읍이 강을 끼고 동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한말에 이르러 청평장이 생기고 일제때 북면에 목동장이 생겨 장이 네 개로 늘어났지만 나중에 생긴 두 곳은 휴시(休市)하는 일이 잦았다. 해방 후에는 목동장이 없어지고 설악장이 생겼다.
1937년 양수교의 건설, 1939년 중앙선 철도의 개통, 1940년 청량리에서 양평까지의 철도 개통 등은 이 일대 나루는 물론 지역경제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준 사건들이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를 계기로 시작된 한강상류에서의 댐 건설은 화천댐(1939~1944)과 청평댐(1939~1943)의 완공을 보았고 해방 후에는 팔당댐이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4년 5월에 준공되었는데, 이러한 댐 건설 역시 수운의 단절을 가져와 이에 의존해 온 이 일대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경인일보, 다시보는 경기산하 2003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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