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리스크/신앙과 리스크

겸손과 리스크

리스크맨 2009. 12. 19. 08:04

오늘 주제는 겸손입니다. 전능 자 앞에서 제한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이 가져야 할 미덕이 최종적으로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겸손이라는 교훈입니다. 간단하고 누구나 잘 이해하는 단어이지만 겸손을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에 대한 책이 있을 정도입니다. 한 제자가 중세의 성자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이냐고. 어거스틴은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두번째, 세번째 덕목도 겸손이라고 그 중요성을 말했다고 합니다. 겸손은 리스크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리스크는 인간이 겸손하지 않아서 발생의 빈도가 높아지고, 또 발생시에 강도가 세지기도 합니다.

 

역대하 32장 20절 이하의 말씀이 오늘 이어집니다. 앗수르왕 산헤림이 전지전능하신 여호와를 일개 잡신과 비교합니다. 물론 그가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최소한 교만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여호와를 그렇게 폄하하고 참담하게 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상대는 여호와의 전능함을 굳게 믿는 군대입니다. 앗수르 군대가 멸망하고 산헤림은 패장이 되어 귀국하여 그 책임을 물어 척살됩니다.

 

25절에는 히스기야가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아 재앙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31절에도 다시 히스기야의 교만으로 하나님이 마땅치 않아 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히스기야처럼 신앙이 돈독하고 또 하나님의 수 많은 이적을 본 사람도 이처럼 교만 앞에서는 무릎을 굻고 맙니다. 역대하는 이 점은 여러 곳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의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히스기야왕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열왕기하에서, 또 아사야서에서도 쓰고 있습니다. 서로 묘사하고자 하는 관점이 다릅니다. 역대하 32장은 겸손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50년을 넘어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는 곳이 드물다고 합니다. 여러 경영학자들이 기업이 망하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리스크관리의 최종목표 역시 조직과 개인으로 하여금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항상 변화합니다. 그 변화과정에서 항상 부침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변화는 위기 즉,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합니다.

 

리스크관리에서 겸손은 바로 리스크 선호도라는 개념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리스크 선호도 (Risk Apetite)란 인수(Taking)할 리스크의 수준입니다. 겸손이란 바로 자신이 감당할 만큼 리스크 선호도를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CEO는 지나친 리스크에 베팅을 해서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타나면 기업을 망하게 합니다. 지나친 리스크의 인수는 교만입니다.

 

기업경영의 예를 본시다. 기업은 자본이 있습니다. 이 자본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자본의 역할은 기업이 추진하는 리스크 사업 (모든 기업활동은 리스크 인수를 댓가로 합니다)이 예상했던 바와 달리 손실로 번질 경우, 이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재원입니다. 자본을 영업을 위한 자금/재원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경영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자본의 역할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업의 자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순자산입니다. 세상살이가 모두 리스크 투성이 입니다. 그래서 어떤 활동을 하든 결국 리스크와 결부됩니다. 그 리스크의 총합이 자신의 순자산보다 작도록 리스크 선호도를 정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고 칩시다. 그 보증의 규모가 내 순자산으로 감당할 수있는 신용리스크 수준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다면 이를 완곡히 (겸손하게) 사양해야 합니다. 보증에 대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엄청난 폐해가 있어서, 성경에서도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묵상에서 이 소재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교회의 청년들 멘토링을 더러 합니다. 한번은 평소에 아끼는 청년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재정적인 이슈에 대해 멘토링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청년은 친지가 타인의 보증을 섰다가 어려운 상황에 빠지자 자신의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이를 도와 주었습니다. 그 규모가 자신이 매달 받는 수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여서 카드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갔습니다. 제가 이미 멘토링을 해 줄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평생 카드빚에 얽메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자신의 수준을 알았다면 이런 지경까지 가지 않아도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습니다.

 

엔드류 머레이는 기도와 신앙의 최종목표는 부흥도 발전도 아니며 오직 감사와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개인과 기업과 조직과 국가의 지속가능한 존속은 바로 리스크 선호도를 적정한 수준에 머물게 하는 겸손에 있습니다. 성경이 역대기하에서 히스기야왕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