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리스크/신앙과 리스크

회개와 용서

리스크맨 2010. 3. 25. 07:11

사순절 기간 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고난 기간에 대해 남다른 깊은 묵상을 하며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용서는 다른 측면에서는 개인이 행복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소냐 리보멈스키 교수의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 라는 책을 보면, 12가지 행복연습에 용서가 들어 있습니다.

 

어제, 오늘 설교에서 영화 밀양에 대한 사례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지아비를 잃은 한 여인이 유일한 희망인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서 살게 됩니다. 거기서 아들이 유괴, 살해되는 비극을 겪습니다. 참담한 고통의 날이였습니다. 그러다 기독교를 전도 받게 되어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감방에 갇혀 있는 유괴범을 찾아가 용서의 마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유괴범은 아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자신이 이미 예수님을 받아 들여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갖던 여인은 이 뻔뻔한 유괴범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순에 구토를 하는 장면 처럼 처참한 심정이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회개라는 간장이 끊어지는 애통함이 없이 용서라는 것이 종교의 이름으로 남발되는 사실 때문입니다.

 

독일에 있을 때 정치인들이 말 실수나 죄를 짓고서 자살하는 일을 몇 차례 보았습니다. 주의 수상, 외무부장관을 했던 연합당의 당수, 정치 지도자 등 제가 살던 13년 동안에만도 여러 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신뢰가 자리를 잡은 독일 정치판에서 실수는 고백 만으로 절대 용서되지 않습니다. 나치 정권을 겪었던 그들의 정치 교육은 더 이상 후진적인 정치판을 묵인하지 않는 높은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한번 잘못을 저지르다 그것이 밝혀지면, '철저한 회개' 절차 없는 입발림 사과나 고백으로는 대중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정치판을 떠나고 그에 응당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용서하지만, 죄 자체를 없었던 일로 간주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 날 독일이라는 신뢰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에는 용서는 있지만 회개가 없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참 뜻, 그리고 신뢰사회의 참뜻은 절대 아닙니다. 요즘 정치판에서 쏟아지는 속칭 리더들의 뻔히 속이 들여다 보이는 모르쇠와 '회개'가 없는 시인을 보면서 우리사회의 후진성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용서는 행복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없는 용서는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평판리스크가 오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실이 반드시 승리하는 사회가 되어야 품격있는 사회가 됩니다. 돈은 많고 물질의 풍요는 있지만 품격이 없는 그런 사회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영혼이 망가지면 어떡하겠습니까. 나부터 먼저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