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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여행 3 - 타이뻬이에서 화련까지

리스크맨 2015. 4. 23. 22:26

김중구 Risk Expert 대만 견문기 3

 

앞글에서 잠깐 언급한 타이루거 협곡을 가기 위해 타이뻬이에서 열차를 타고 화련으로 갔다. 대도시를 벗어나 이 나라의 전원지역과 소도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타이뻬이에서 서민들의 삶은 여느 신흥공업국가의 대도시처럼 팍팍하고 여유가 없다.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시골의 농업종사지들이 더 좋은 삶을 위해 도시로 진출했다. 우리나라도 40년전에 그랬고 중국은 지금 농공이주자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우선 역사로 들어왔을 때, 타이페이의 안전관리 수준을 한 번 살펴 보았다. 일본보다는 덜 정교하고,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송산역 지하의 의자,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같은 Risk Event가 발생하면 유독가스가 이슈가 됨. 이 의자는 불연재일까?>

<한자표기만 주로 되어 있는 나라에서 유독 화재비상 벨은 영어로 표기, 가이드에게 물어봤더니, 이건 역직원이 취급하는 것이기에 영여로 표기되어도 오케이라고 함. 과연 그럴까?>

<에스컬레이터에 맹인을 위한 점자 표기가 없음. 동경은 가장 잘 되어 있고,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점자안내가 되어 있음>

<화장실 고장 안내와 그 앞에 놓여 있는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짐을 조심하라는 표지판. 위험평가의 기초적인 수준인 듯>

우리나라 무궁화급에 해당하는 거광호 열차로 화련으로 향했다. 역에서 눈에 띄는 것은 플렛폼에서 열차로 오르는 동선이 일치해서 손쉽게 오르게 되어 있었다. 점점 늘어나는 시니어를 배려한 것이라면 칭찬할만 하다. 역사는 청결했고 로비에는 편의점과 빵집이 있었다. 편의점에는 군고구마, 오뎅, 핫도그 등 간식(대만식 식사)도 팔고 있었다. 빵집의 빵 가격은 45원으로 우리나라 보다는 다소 싼편이였다. 건강식 집곡빵은 서울과 비슷했다. 대만 물가는 서울보다 조금 싸다고 한다.

 

<역무원의 모습. 보통사람이 어떤 행복감을 가지고 살까?>

<깔끔한 지하 역사의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실내정원이 맘에 듬>

<화장실 고장 공지판. 만만디>

 

<지하 역사 안에 있는 빵집. 32원X37원=우리나라돈 1200원. 물가가 서울보다 약간 싼 것으로 알려짐.>

<지하역사 내의 편의점. 대만은 맞벌이 부부가 많아 편의점이 아주 발달되어 있음. 일본처럼 편의점 내에 군고구마, 오뎅까지 판매. 소규모 자영업 식당이 점차 쇠퇴될 것. 편의점은 대기업 체인이므로 경쟁이 안됨.>

 

<몇 일전 사망한 싱가포르 이광요 전 수상의 자서전이 편의점 서가에 놓여 있음. 국민당의 폭정에 시달렸던 대만인들은 이광요와 같은 독재형 성장주의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역사에 있는 광고물. 나무를 살리자 캠페인. 종이와 에너지를 절약하여 나무와 숲을 보호하자는 내용. 금산 여행기 부문에서 쓰겠지만, 대만은 일본 통치하에 숲이 많이 망가짐.>

 

<내가 아침식사 대용으로 서울에서 주로 사먹는 잡곡빵. 가격이 90원이라고 함. 3,400원(한화) 서울보다 약간 저렴한 수준>

 

<일제의 수탈로 시작된 대만철도가 어느덧 100년 역사가 됨>

<지하 승강장 모습. 차단막이 없음. 일반철도이며 지하 승강장이라 차단막 필요성을 있어보임.>

<열차 내부 모습. 아침에 이용했던 객차는 현대중공업 제작.>

 

거광호 객차는 현대중공업에서 제작한 거란다. 돌아오는 열차의 객차는 히다치 사 제품인데 오전객차보다 수령이 오래된 것이다. 일본이 독식하던 동남아 중공업 제품 시장을 한국이 일부 점유했다는 의미가 된다.

 

화련으로 향하는 철도는 우측의 산맥과 좌측의 해안선을 끼고 달리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도시를 빠져 나오자 모내기를 시작한 논, 채소를 심은 밭, 바나나 농장 등을 자니치며 동남향으로 향한다. 화련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모내기를 한 논의 모습. 화련 이북은 2모작>

 

 

<바나나 농장>

 

<기차와 승강장 높이가 같아서 오르 내리기에 매우 편리함>

<화련역 경내. 대리석 조각과 열대 식물로 장식>

 

<이층 짜리 화련역 모습. 대만인들은 외형 보다는 내실 위주라고 함.>

<조용한 화련 시가지 모습. 보도 블럭이 모두 대리석>

<화련역 광장에 있는 대리석 조각. 타이루거는 대리석이 매우 흔함>

<소박한 화련역 대합실 모습>

<화련역의 편의점. 오픈 형태이며 오뎅까지 있음.>

<화련역전의 밤거리 모습. 12000천명이 사는 소도시이니 관광객이 없으면 매우 한적한 곳.>

<화련역의 현병 오피스. 대만도 군인이 많으니 헌병사무소가 버젓이 길거리에 있음.>

<저녁에 귀환할 때 탄 객차는 히다치 제작. 오래 됨.>

화련은 인구 약 12,000의 소도시이며 원래 아미족이라는 원주민이 살았다. 대만 원주민은 16개 부족이 있는데 아미족과 타이루거 협곡에 사는 태로각족이 인구가 가장 많다. 아미족은 폴로네시아계 남방인으로 필리핀 사람들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체구는 작고 피부는 검은 색을 띤다. 이들 출신 탤런트, 가수, 야구선수가 많다고 한다. 술 먹은 다음날은 출근을 않하기도 하는 낙천적 성격을 가진다고 한디. 불교와 도교를 믿는 중국인들과 달리 기독교를 믿고 공동묘지에는 십자가를 세운다.

 

장개석 총통이 1950년대말 타이루거 협곡을 뚫는 동서교통로 대역사 프로잭트를 실행했다. 대리석과 석회석의 약한 지반 때문에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지 못하고 삽과 곡괭이로 수작업에 의존해야 했다. 이때 이 공사에 투입된 5000명의 인부들은 주로 중국대륙에서 내려온 노병, 죄수, 아미족이였다고 한다. 장총통은 노병들에게 협곡 프로젝트가 끝나면 본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모택동이 집권세력으로 대륙에 뿌리를 내리자 이 약속은 영영 지켜질 수가 없었다. 노병들의 대부분은 화련의 아미족 여인을 맞아 결혼하고 가정을 차렸다. 화련지역주민 중에 중국인과 아미족의 혼혈이 많은 이유가 이런 배경이 있다.

 

열차가 화련에 도착해서 플랫폼을 빠져 나오니 전원의 작고 아담한 도시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화련은 대리석가공 산업이 발달되어 있고 타이루거를 찾는 수 많은 방문객을 통한 관광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도시 곳곳에는 대리석 조각품이 서 있고 보도불럭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을 정도로 대리석 주산지 다운 모습을 보인다.

 

점심식사 후에는 남도문화극장에서 아미족 고유의 민속공연을 관람했다. 관람 중에 무희들과 함께 춤을 추고 이들과 사진촬연을 했다. 쇼가 끝날 때까지 10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대리석 액자에 담긴 사진을 인화해 왔다. 가격은 400원. 대리석 테두리를 생각하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는 추억거리여서 하나 구입했다. 6-7가지 서로 다른 춤과 묘기를 보아는 아미족 민속공연은 흥미로운 이벤트였다.

 

화련은 북회귀선이 지나는 곳이다. 화련을 기준으로 이남은 삼모작이 가능하고 이북은 이모작 벼농사를 짓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