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가을 13년간의 독일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습니다. 처가집이 있는 강남 신사동에 자리를 잡았지만, 서울 생활이 답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가 전원풍인 독일에서 살다가 서울로 바로 옮겨 왔으니 처음에는 적응을 못한 것이 당연했습니다.
몇 달간의 서울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외국으로 나갈 것을 심각하고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으로 가기 전에 서울 근교에서 전원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외국은행에 근무하면서 토요일을 쉬었습니다. 그런 여유를 이용하여 토요일 새벽이면 늘 새벽기도를 마치고 전원생활 예정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고향이 강원도라 일단 서울의 동쪽인 일죽, 곤지암, 광주 등지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물론 전원터의 3대 요소인 산, 강, 철도를 중시 여겼습니다. 여러 곳을 수 개울 동안 다녔지만,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서종면 수능리라는 곳에 '시인의 마을' 이라는 전원마을을 짓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신문에 실렸던 곳을 물어 물어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예정지에는 아직 말뚝 하나도 박혀 있지 않았습니다.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 오는 길에 서종면 문호리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식사 후에 마을을 둘러 보게 되었는데, 북한강가에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또 우체국, 서울가는 버스 정류장, 농협, 수퍼, 보건소, 초등학교, 중학교 등 모든 시설이 시골답지 않게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찾고 있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라고 쾌재를 부르고 다음 주부터 주말마다 문호리를 찾아 왔습니다. 새벽에 밭에서 일하는 할아버지를 만나 이 동네 사정을 묻기도 하고, 어디가 명당자리인지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였던 큰 아이를 생각해서 초등학교 학생수, 선생님 수준을 알아 보았더니 여러 가지 대도시에 비해 손색이 없었습니다.
또 교회 목사님의 설교도 들어 보고 교회에 다니는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제법 자세하게 이 동네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문호리는 팔당댐이 생기기 전에는 문호나루가 있었습니다. 문호나루는 뚝섬나루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나루였습니다. 강원도에 내려오는 땟목, 장작, 숯 같은 곳이 북한강을 따라 내려와서 이 곳에 집하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미 3000명 이상의 주민이 있었고 그에 맞는 인프라가 잘 갖추어 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댐이 생긴 후, 문호나루는 문을 닫게 되고 인구는 800명 까지 떨어 졌습니다. 제가 이사를 오던 1995년만 해도 인구는 10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 인구가 꾸준히 늘어, 지금은 다시 3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시골행을 반대하는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우선 마을 중심에 있는 빌라를 구입했습니다. 그 곳에 살면서 동네 할아버지가 명당이라고 찝어준 땅을 수소문하고 그 주인을 찾아 그 땅을 매입했습니다. 이 땅을 건축이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5톤 트럭 300차가 넘는 분량의 자갈 흙을 사다가 부었습니다. 이 것을 다시 2년 정도 가라 앉힌 다음, 1999년 집을 지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에는 말뚝도 없었던 '시인의 마을'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 곳은 제가 방문했던 얼마 후, 대지가 조성되어 집들이 한 둘 들어서더니, 지금은 인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원마을이 되었습니다.
잘 단장된 시인의 마을 초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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